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가 전투 (문단 편집) == 전투의 결과 == 이 전투로 독일군은 독일인 16명, 원주민 병사 55명이 죽고 76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만을 입은 반면, 영국군은 약 500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487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. 또한 목표로 한 탕가의 점령 및 독일군 병력의 일소 또한 실패했다. 이후에도 영국군은 연인원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[[독일령 동아프리카]]에 파견해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으나, 포어베크 대령의 독일군은 제대로 된 병력과 물자의 지원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[* 지리상의 거리와 해군력의 부족으로 인해 독일 본토로부터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했다. 근해에 침몰한 [[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(1905년형)|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함]]에서 함포를 뜯어내 [[야포]]로 사용하고 승조원들인 [[수병]]들과 [[부사관]], 장교들을 합류시킨 게 사실상 유일한 증원이었다.] 적절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며 영국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. 영국군이 이 지겨운 전쟁을 끝낼 수 있던 건 1918년 독일이 항복하여 포어베크 장군[* 전쟁 중 소장으로 진급했다.]이 교전을 중지하고 영국군과 종전협정을 맺은 뒤에야 가능했다. 동아프리카를 들쑤시고 다닌 포어베크 군의 여정에 대해서는 [[제1차 세계 대전/아프리카 전선]] 항목 참조. [[파울 폰 레토포어베크]] 장군은 동아프리카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"아프리카의 사자(Der Löwe von Afrika)"라는 별명을 얻었고,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승전(?) 퍼레이드를 할 수 있었다. 포어베크 장군은 육군에서 퇴역한 후 [[바이마르 공화국]]의 [[의회]] [[의원(정치인)|의원]]으로 활동했으나 재선을 포기한 뒤로는 야인으로 지냈다. 이후 집권한 [[나치당]]과는 그닥 좋은 관계가 아니었는데, 아프리카에서 흑인 장병들과 함께 활동한 경험으로 인해 나치식 인종주의에 반감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.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[[나치 독일|나치 정권]]은 그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독일 민족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[[프로파간다]]를 형성했으며, 1938년에는 포어베크 장군에게 [[독일 국방군]] 육군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. 하지만 당시 포어베크는 70이 다 된 [[노인]]이었기 때문에 군 원로로서의 명예직 정도만 활동했다. 포어베크 장군은 90이 넘게 [[장수]]하고 1964년 [[노환]]으로 [[사망]]했다. 그리고 전투가 벌어진 지 50년이나 지난 그 해에 [[서독]] [[정부]]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했던 아스카리 중 생존한 장병들에게 [[연금]]을 지급하기로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